.
본 글은 일본통일교에 입교하여 활동하다 통일교가 거짓종교임을 알고 탈퇴하여,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블로그를 통하여 널리 알리고 있는 전통일교였던 분이 정리하여
작성한 내용을 옮겼읍니다.
또한 한일해저터널에 대한 내용은 일본 위키피디아에서도 이미 정리하여 수록되어 있읍니다.
일본 위키피디아 :
http://ja.wikipedia.org/wiki/%E6%97%A5%E9%9F%93%E3%83%88%E3%83%B3%E3%83%8D%E3%83%AB
본 글은 일본통일교에 입교하여 활동하다 통일교가 거짓종교임을 알고 탈퇴하여,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블로그를 통하여 널리 알리고 있는 전통일교였던 분이 정리하여
작성한 내용을 옮겼읍니다.
또한 한일해저터널에 대한 내용은 일본 위키피디아에서도 이미 정리하여 수록되어 있읍니다.
일본 위키피디아 :
http://ja.wikipedia.org/wiki/%E6%97%A5%E9%9F%93%E3%83%88%E3%83%B3%E3%83%8D%E3%83%AB
통일교가 1981년에 발표한 국제 하이웨이, 한일해저터널,
2005년에 발표한 베이링 해협 피스 킹·브릿지·터널이라고 하는 계획이 있다.
모두 장대한 계획이며, 식구나 통일운동의 찬동자들은, 문선명씨가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구상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구상은, 문선명씨가 1981년에 발표하기 이전으로부터 있던 것이다.
2005년에 발표한 베이링 해협 피스 킹·브릿지·터널이라고 하는 계획이 있다.
모두 장대한 계획이며, 식구나 통일운동의 찬동자들은, 문선명씨가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구상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구상은, 문선명씨가 1981년에 발표하기 이전으로부터 있던 것이다.
0 아시아·하이웨이
1959년, 오스트레일리아의 브로드 비치에서 개최된 제15회「유엔 아시아 극동 경제 위원회」
(ECAFE, 현ESCAP) 총회에서 채택된 것.
이 도로는 41 노선으로 되어, 전체 길이는 약 66,000 km에 이르러, 14 노선,
약 38,000 km를 우선 도로로 지정하고 있다.
관계국 가운데, 군정하의 미얀마( 구버마)의 도로 정비가 가장 늦어 여기를 경계로 방글라데시에서
서쪽과 타이에서 남동의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다(그 후 더욱 더 말레이 반도로 계속 된다).
아시아·하이웨이의 실시에 대해서는, 각국의 재정 사정을 고려해, 단계적인 공사 시공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또 터키와 이란의 국경에서 유럽·하이웨이망에 접속되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1995년에는, 「 신아시아·하이웨이」계획이 승인을 얻었다. 이 계획으로, 하나의 초점이 되고 있는 것이,
중국내의 루트이다.
중국은 지금까지, 자국의 교통 정책을 최우선 해 왔지만, 몽골과 함께 신노선으로 추가, 승인되었다.
1959년, 오스트레일리아의 브로드 비치에서 개최된 제15회「유엔 아시아 극동 경제 위원회」
(ECAFE, 현ESCAP) 총회에서 채택된 것.
이 도로는 41 노선으로 되어, 전체 길이는 약 66,000 km에 이르러, 14 노선,
약 38,000 km를 우선 도로로 지정하고 있다.
관계국 가운데, 군정하의 미얀마( 구버마)의 도로 정비가 가장 늦어 여기를 경계로 방글라데시에서
서쪽과 타이에서 남동의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다(그 후 더욱 더 말레이 반도로 계속 된다).
아시아·하이웨이의 실시에 대해서는, 각국의 재정 사정을 고려해, 단계적인 공사 시공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또 터키와 이란의 국경에서 유럽·하이웨이망에 접속되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1995년에는, 「 신아시아·하이웨이」계획이 승인을 얻었다. 이 계획으로, 하나의 초점이 되고 있는 것이,
중국내의 루트이다.
중국은 지금까지, 자국의 교통 정책을 최우선 해 왔지만, 몽골과 함께 신노선으로 추가, 승인되었다.
0 일본의 전쟁전의 국제 연락 운수
1910년(메이지 43년) 4월 일본으로부터 러시아의 東清鉄道에 연락운수를 개시.
신바시(新橋), 히라누마(平沼 당시 요코하마역의 대체역), 오사카등의 각 역으로부터,
우선, 열차로 츠루가역으로 가서, 그리고 그곳에서 가까운 츠루가항으로부터 선박으로 블라디보스토그에,
그리고 거기에서 하바로프스크·하얼빈등에 가는 것과 코베·모지(門司) 역에 가, 선박으로 중국의 대련에,
그리고 하얼빈·치치하루등으로 향하는 것이라는, 두 개의 루트로의 연락 승차권이 판매되었다.
1910년(메이지 43년) 4월 일본으로부터 러시아의 東清鉄道에 연락운수를 개시.
신바시(新橋), 히라누마(平沼 당시 요코하마역의 대체역), 오사카등의 각 역으로부터,
우선, 열차로 츠루가역으로 가서, 그리고 그곳에서 가까운 츠루가항으로부터 선박으로 블라디보스토그에,
그리고 거기에서 하바로프스크·하얼빈등에 가는 것과 코베·모지(門司) 역에 가, 선박으로 중국의 대련에,
그리고 하얼빈·치치하루등으로 향하는 것이라는, 두 개의 루트로의 연락 승차권이 판매되었다.
1911년(메이지 44년) 3월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하여 모스크바·산크트페테르브르그 등,
러시아 중심부에의 승차권도 판매 개시.
1913년(타이쇼 2년) 6월 유럽의 암스테르담·파리 등 각지에의 승차권의 판매를 개시.
1913년(타이쇼 2년) 10월 조선 총독부 철도·남만주철도 경유로 중국의 북경·아마츠등으로의 연락
승차권을 판매 개시.
러시아 중심부에의 승차권도 판매 개시.
1913년(타이쇼 2년) 6월 유럽의 암스테르담·파리 등 각지에의 승차권의 판매를 개시.
1913년(타이쇼 2년) 10월 조선 총독부 철도·남만주철도 경유로 중국의 북경·아마츠등으로의 연락
승차권을 판매 개시.
1914년(타이쇼 3년)~1917년(타이쇼 6년) 경제1차 세계 대전·러시아 혁명등의 영향으로 인하여,
유럽으로의 연락 승차권 판매를 중단. 그 후 소련의 건국 후에도, 시베리아 출병등이 있어 재개는
당분간 되지 않았다.
1927년(쇼와 2년) 8월 유럽에의 연락 승차권 판매를 재개.
1939년(쇼와 14년)~1941년(쇼와 16년) 경제이차 세계대전의 발발·격화로 인하여,
유럽으로의 연락 승차권 판매를 중지.
유럽으로의 연락 승차권 판매를 중단. 그 후 소련의 건국 후에도, 시베리아 출병등이 있어 재개는
당분간 되지 않았다.
1927년(쇼와 2년) 8월 유럽에의 연락 승차권 판매를 재개.
1939년(쇼와 14년)~1941년(쇼와 16년) 경제이차 세계대전의 발발·격화로 인하여,
유럽으로의 연락 승차권 판매를 중지.
1945년(쇼와 20년) 6월 무렵 태평양전쟁의 전황이 극도로 악화되어,
조선·중국으로의 연락이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위 지역으로의 연락 승차권 판매도 자연 중지되었다.
전쟁 전 전성기의 일본으로 부터 시베리아 철도로의 경로, 전쟁 전부터 전시중에 걸쳐
일본~조선·중국·유럽간의 연락 수송이 활발하게 행해졌지만,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 대륙으로 가,
거기로부터 시베리아 철도에 탑승해 유럽으로 향하려면 , 다양한 루트가 존재하고 있었다.
전쟁 전, 유럽아시아 연락 수송이 가장 활발히 행해진 1934년(쇼와 9년) 12월 무렵의,
이것들을 정리하여 기술하면 아래와 같이 된다.
조선·중국으로의 연락이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위 지역으로의 연락 승차권 판매도 자연 중지되었다.
전쟁 전 전성기의 일본으로 부터 시베리아 철도로의 경로, 전쟁 전부터 전시중에 걸쳐
일본~조선·중국·유럽간의 연락 수송이 활발하게 행해졌지만,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 대륙으로 가,
거기로부터 시베리아 철도에 탑승해 유럽으로 향하려면 , 다양한 루트가 존재하고 있었다.
전쟁 전, 유럽아시아 연락 수송이 가장 활발히 행해진 1934년(쇼와 9년) 12월 무렵의,
이것들을 정리하여 기술하면 아래와 같이 된다.
부산·신쿄(新京) 경유
우선 산요(山陽) 본선의 시모노세키역으로 가, 거기로부터 철도성이 운영하고 있던
관부연락선(시모노세키~부산간)으로 조선의 부산으로 향한다.
그리고 조선 총독부 철도와 남만주철도로 신쿄(현재의 창춘, 당시 만주국의 수도에서 만났다.) ,
하얼빈, 만주마을(중국과 러시아의 국경), 치타(러시아)를 경유해 시베리아 철도에 접속하는 것.
우선 산요(山陽) 본선의 시모노세키역으로 가, 거기로부터 철도성이 운영하고 있던
관부연락선(시모노세키~부산간)으로 조선의 부산으로 향한다.
그리고 조선 총독부 철도와 남만주철도로 신쿄(현재의 창춘, 당시 만주국의 수도에서 만났다.) ,
하얼빈, 만주마을(중국과 러시아의 국경), 치타(러시아)를 경유해 시베리아 철도에 접속하는 것.
대련(大連)·신쿄(新京) 경유 산요(山陽) 본선의 코베역 또는 모지(門司)역으로 향해,
거기에서 대련으로의 항로에 탑승한다.
대련에서는 남만주철도에 탑승해, 나머지는 부산 경유와 같은 경로에서 시베리아 철도에 접속하는 것.
츠루가(敦賀)·블라디보스토그 경유 호쿠리쿠 본선의 츠루가항역(기선과의 접속을 도모하기 위해,
츠루가항의 일각에 설치된 역. 선박의 발착할 때만 여객 열차가 입선 했다.) 으로 향해,
츠루가항으로부터 블라디보스토그의 항로를 탄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그로부터 시베리아 철도에 접속하는 것.
거기에서 대련으로의 항로에 탑승한다.
대련에서는 남만주철도에 탑승해, 나머지는 부산 경유와 같은 경로에서 시베리아 철도에 접속하는 것.
츠루가(敦賀)·블라디보스토그 경유 호쿠리쿠 본선의 츠루가항역(기선과의 접속을 도모하기 위해,
츠루가항의 일각에 설치된 역. 선박의 발착할 때만 여객 열차가 입선 했다.) 으로 향해,
츠루가항으로부터 블라디보스토그의 항로를 탄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그로부터 시베리아 철도에 접속하는 것.
이러한 것들 중에는「부산·신쿄 경유」가 유럽으로 가는데 있어 가장 빠른 루트로,
1934년(쇼와 9년) 12월 당시는 도쿄역을 15시에 특별 급행 열차「후지(富士)」로 출발해,
시모노세키에 다음날의 9시 30분에 도착해 접속하는 관부항로가 10시 30분 발,
그리고 부산에 18시에 도착해 이곳에서 19시 20분 발의 급행「히카리(光)」로 갈아타면,
신쿄에는 도쿄발 3일째의 21시에 도착했다. 거기에서 나아가 갈아타고 가면, 모스크바(소련)에는
도쿄를 출발해 12일째의 17시, 베를린(독일)에는 14일째의 9시 23분 , 파리(프랑스)에는 15일째의 6시 43분 ,
로마(이탈리아)에는 동일 9시, 런던(영국)에는 같은 날의 16시 55분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모두 현지 시각)
1934년(쇼와 9년) 12월 당시는 도쿄역을 15시에 특별 급행 열차「후지(富士)」로 출발해,
시모노세키에 다음날의 9시 30분에 도착해 접속하는 관부항로가 10시 30분 발,
그리고 부산에 18시에 도착해 이곳에서 19시 20분 발의 급행「히카리(光)」로 갈아타면,
신쿄에는 도쿄발 3일째의 21시에 도착했다. 거기에서 나아가 갈아타고 가면, 모스크바(소련)에는
도쿄를 출발해 12일째의 17시, 베를린(독일)에는 14일째의 9시 23분 , 파리(프랑스)에는 15일째의 6시 43분 ,
로마(이탈리아)에는 동일 9시, 런던(영국)에는 같은 날의 16시 55분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모두 현지 시각)
또한 1937년(쇼와 12년) 1월 당시 , 도쿄~런던간은 부산·모스크바·베를린 경유로 13,645 km로,
그 운임은 일등 795엔, 2등 560엔, 삼등 390엔이었다.
덧붙여서 당시의 은행원의 첫월급은 70엔, 시각표의 가격이 25전, 커피 한잔이 15전 정도였다고 한다.
그 운임은 일등 795엔, 2등 560엔, 삼등 390엔이었다.
덧붙여서 당시의 은행원의 첫월급은 70엔, 시각표의 가격이 25전, 커피 한잔이 15전 정도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