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의 독립운동 주장과 진실

中曽根康弘氏 回想記『二十三歳で三千人の総指揮官』

최대어 2015. 2. 19.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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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sahi-net.or.jp/~pb6m-ogr/ans020.htm

 吉見義明(요시미 요시아키)저「從軍慰安婦」(岩波新書)에 의하면, 中曽根康弘(나카소네 야스히로)씨는 戰時中에는 主計將校(중위)로서 

轉戰 했습니다만, 回想記「23세에3천명의 總指揮官」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고 합니다( 同書 72 페이지). 
3천명으로 구성된 대부대다. 
이중에는, 원주민의 여자를 덮치거나 도박에 빠지는 이도 나왔다. 
그런 그들을 위해서, 나는 고심하다, 慰安所를 만들어 준 적도 있었다. 그들은, 정확히, 대야 속에 북적거리는 미꾸라지였다. 
(松浦敬紀編(마츠우라 타카시)기편「終りなき海軍(끝없는 해군)」)이 문장내요으로 보면, 병사들을 위해서 고심하고, 좋은 것을 해 주었다고 

하는 자부심은 느껴집니다만, 이 시설을 위해서 다수의 여성중에는, 中曽根씨가「原住民의 여자」라고  불린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이 성적 노예 상태에 있었던 것에 대한 반성은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78년무렵에 쓰여진 문장같습니다만, 전후 30년 이상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발상이 전시중 그대로 인것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일까요. 
게다가, 그러한 사람이 수상까지도 지냈다고 하는 것이니까, (적어도 78년무렵까지는) 일본은 전쟁 전과 그렇게 변함없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교적 최근이라도, 新生党(당시 )의 羽田内閣의 永野茂門(나가노 시게토) 法務大臣은, 南京大虐殺은「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해 사임했습니다만, 이 발언 시에, 慰安婦問題에도 언급해「慰安婦는 당시의 公娼이며, 그것을 지금의 사고기준으로 女性蔑視라든지, 

韓国人差別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아사히 신문」94년 5월 7 일자)이라고 말했습니다.

中国、朝鮮, 그 외의 아시아제국 출신의 從軍慰安婦의 경우에는, 강제적으로 연행되거나 간호사라 하는등으로 속여 내보내어져(「從軍慰安

婦」111 페이지), 자유를 빼앗겨 일본군에 의해서 性的奴隷狀態(實質的인 監禁狀態로, 1일에 60명여를 상대해야 했던 경우가 있었던 것이 

同書의 141 페이지에 실려 있습니다)에 놓여진 사람이 많았던 것에 대해 永野氏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요. 日本軍이 慰安所를 개설한

 것은, 占領地에서의 強姦事件의 방지와 성병의 예방이 주목적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기향상을 위해라고 하는 면도 있던

 것 같습니다. 
식료마저도 충분히는 지급되지 않는 가운데 , 건전한 오락시설도 거의 없고, 휴가도 전시에는 주어지지 않았던 경우, 사기가 저하하는 것은 

당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병사에 있어서「유일한 樂天地」로서, 위안소가 설치되었다고 하는 면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從軍慰安婦」53―54 페이지). 

그 때, 위안부, 특히 아시아제국 출신의 慰安婦의 인권은 무시되게 되었습니다. 
아시아의 사람들의 인권을 유린해 가면서, 「大東亜共榮圈」을 건설하자고 하는 것은, 일구이언이었다라고 하는 것은, 전쟁을 하고 있는 병

사들에게도 명백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런 병사들을 싸우게 하는 가장 안이한 방법이 慰安所였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保守系의 政治家의 상당수는, 從軍慰安婦問題나 南京大虐殺로부터 눈을 돌리려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行政, 司法組織도, 이것들 사건에 대한 정보가 별로 국민에게 전해지지 않토록 수단을 강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南京大虐殺은 日本軍의 組織的行動이다라고 하는 내용을 敎科書에 실으려고 한 家永氏에 대해서, 문부성은 재작성을 명령해, 이것에 불복

하여 일으킨 재판이 文部省의 敎科書檢定이 위법이었다고 인정되기까지, 32년의 세월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와 같이 거부반응이 강한 것은, 이 두 개의 사실은, 太平洋戰爭이라는 것이, 「大東亜共榮圈」의 건설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단순한 

侵略戰爭인 것을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保守系政治家의 일부는, 어릴 때부터 그런식으로 교육받았기 때문에, 아직까지 다 

없어지지않은 愛国思想과, 이것들의 사실이 너무나 동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직시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본이 아시아

제국의 사람들로부터 신뢰 받게 되기 위해서는, 전쟁때에 일본군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 피해자가 된 이들 나라들의 사람들과 공통 

인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 출발점은 아닐까 생각합니다(98년 6월 18일).

 

吉見義明著『従軍慰安婦』(岩波新書)によれば、中曽根康弘氏は戦時中は主計将校(中尉)として転戦しましたが、回想記『二十三歳で三千

人の総指揮官』に次のように記しているそうです(同書72ページ)。

三千人からの大部隊だ。やがて、原住民の女を襲うものやバクチにふけるものも出てきた。そんなかれらのために、私は苦心して、慰安所をつくってやったこともある。かれらは、ちょうど、たらいのなかにひしめくイモであった。(松浦敬紀編『終りなき海軍』)

この文面から、兵士のために苦心して、いいことをしてやったという自負心は感じられますが、この施設のために多数の女性(この中には、中曽根氏が「原住民の女」と呼んだ人々も含まれていたでしょう)が性的奴隷状態におかれたことに対する反省は全く感じられません。78年ころに書かれた文章のようですが、戦後30年以上経っているにもかかわらず、発想が戦時中のままのように思えるのは私だけでしょうか。しかも、そういう人が首相までも務めたというのですから、(少なくとも78年ころまでは)日本は戦前とそう変わっていないと思わざるを得ません。

比較的最近でも、新生党(当時)の羽田内閣の永野茂門法務大臣は、南京大虐殺は「でっち上げだと思う」とのべて辞任しましたが、この発言の際に、慰安婦問題にもふれ、「慰安婦は当時の公娼であって、それを今の目から女性蔑視とか、韓国人差別とかは言えない」(『朝日新聞』94年5月7日付)と述べました。中国、朝鮮、その他のアジア諸国出身の従軍慰安婦の場合には、強制的に連行されたり、看護婦にするなどと偽って送り出されて(『従軍慰安婦』111ページ)、自由を奪われ、日本軍によって性的奴隷状態(実質的な監禁状態で、1日に60人もの相手を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場合があったことが同書の141ページに載っています)に置かれた人が多かったことについて永野氏はどう考えているのでしょうか。

日本軍が慰安所を開設したのは、占領地での強姦事件の防止と性病の予防が目的とされていました。しかし、実際には士気の向上のためという面もあったようです。食料さえも十分には支給されない中で、健全な娯楽施設もほとんどなく、休暇も戦時には与えられなかった場合、士気が低下するのは当たり前といえます。そのため、兵士にとって「唯一の楽天地」として、慰安所が設置されたという面が強かったようです(『従軍慰安婦』53―54ページ)。その際、慰安婦、とりわけアジア諸国出身の慰安婦の人権は無視されることになりました。アジアの人々の人権を踏みにじっておいて、「大東亜共栄圏」を建設しようというのは、二枚舌だというのは、戦争をしている兵士にも明白だっ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そんな兵士を戦わせる最も安易な方法が慰安所であったといえましょう。

保守系の政治家の多くは、従軍慰安婦問題や南京大虐殺から目を背けようとしているようです。それだけでなく行政、司法組織も、これら事件についての情報があまり国民に伝わらないように機能しているようです。南京大虐殺は日本軍の組織的行動であるという記述を教科書に載せようとした家永氏に対して、文部省は書き直しを命じ、これを不服として起こされた裁判で文部省の教科書検定が違法であったことが認められるまでに、32年もの年月を必要としました。

このように拒絶反応が強いのは、この二つの事実は、太平洋戦争というものが、「大東亜共栄圏」の建設を目的としたものではなく、単なる侵略戦争であったことを明確に物語っているためでしょう。保守系政治家の一部は、幼いころからたたき込まれたため、いまだに抜けきれないでいる愛国思想と、これらの事実があまりにかけ離れているため、直視できないのだと思います。しかし、日本がアジア諸国の人々から信頼されるようになるためには、戦争の時に日本軍は何をしたのかについて、被害者となったこれら国々の人々と共通認識を持つようになることが出発点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98年6月18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