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통난 거짓말들

最强의靈能士 開天先生의 證言 시리즈-2)영감상법의 "마이크로 부대"

최대어 2015. 2. 19.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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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통일교에 입신하게 된 경위는,

정체를 숨긴 전도와 셋트로 된 영감상법에 걸렸기 때문이다.

80년대초, 대학병원에서 방사능을 사용한 핵의학의 기사로 근무하고 있었던 그의

방에 인감을 팔려고 가장한 신자가 방문했다.

이미 자신의 인감을 갖고 있던 그는, 영감상법의 인감을 사게했던 것은,

신자의 다음과 같은 말 한마디였다.

"이대로라면 모친이 매우 위급한 처지에 놓인다....."

항상 모친을 그리워 해 왔던 그는 결국, 신자의 말에 따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후, 인감 다음에는 항아리, 항아리 다음에는 고려인삼을 농축한 액기스를 구입하는등

계속이어 졌지만, 항아리는 120만엔, 인삼액기스는 12개에 96만엔 그것을 5,6회 사서

헌금했다.

또, 그것을 병행하여"원리강론"을 공부하게 돼, 83년 5월에 본부협회시험이라고 하는

통일협회의 시험을 쳐서 본부회원에 가입되어, 토쿄 시부야에 있는 지부 松涛 

본부의 정회원이 되었다.

통일교에서는, 초기의 연수가 끝나면"홈"이라고 하는 곳에서 공동생활에 들어가

관련사업에 종사한다.

이것을 내부용어로 "헌신'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는, 84년1월에 퇴직금등 합해서

280만엔을 헌금하고 89년까지 약 5년반에 걸친기간을 "헌신"생활을 보냈다.

최초는 마이크로버스에서 경험을 하고, 안주를 팔며 도는 "마이크로부대"에 참가하여,

전국톱의 성적을 이룩하였다.

그것이, '구원"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앞뒤 생각없이 매진하여 왔지만,

생각과 달리 "영감상법'은 사회로 부터 맹렬한 지탄을 받게 되었다.

스스로, "영감상법"의 피해자였던 그는 공교롭게도 실적을 높여 "영감상법"의

靈能士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 영감상법의 선두에 서서, 가장 헌금활동이 가열되었던 80년대 중반은, 범죄상에도 남는

미해결사건이나 큰사건이 일어났던 시기였다.

84년에는 에자키사장유괴로 부터 시작된 일련의 "그리코 모리나가 사건"이나 세계일보 전사장이

습격된 "후쿠시마사건" 85년에는 "토요타상사 사건" 87년에는 아사히신문 토쿄본사가 습격된

"赤報隊 사건"등이 일어났다.

여러가지 사건이 사회불안을 증폭하고, 영감상법을 하기에는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다.

현재, 정식으로 탈회서를 제출하고, 스스로 "開天先生"과는 고별을 고하고 있는 그의 증언을

기초로, 통일교의 "영감상법"과 "靈能士"의 실체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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